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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욕(正欲)을 읽다. -아사이 료 장편 소설.
    문화생활 후기 2024. 4. 4. 22:13

    정욕(正欲)을 읽다.

    작년 어느날, 유튜브에서 영화 관련 컨텐츠를 훑어보다가 우연히 정욕(正欲)이라는 일본 영화 예고편을 보게 되었다. 이 예고편에서 가장 눈에 들어왔던 것은 주인공으로 나온 아라가키 유이가 초점이 없는 죽은 눈으로 조용히 대사를 읊조리는 장면이었다. 아라가키 유이라면 포키 CM처럼 밝고 명랑한 이미지로 유명한 여배우인데, 잠시 못보던 사이에 이렇게나 무미건조한 새로운 모습이 너무나 큰 인상에 남았고, 이 관심은 아사이 료의 원작 소설을 찾게 되는 계기로 이어졌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영화(소설)를 보기 전으로 되돌아갈 수 없다‘라는 광고문구도 꽤나 강렬했다. 도대체 어떤 책이길래?

    영화 포스터



    옛날 같았으면 일본 원작 소설을 구하기 위해서 직접 일본이나 교보문고에 가서 직접 구매하거나, 인터넷 서점에서 책을 구매한 뒤 한참을 기다려야 했다. 하지만 지금은 세상이 좋아져서인지 검색을 통해 손쉽게 전자책으로 구매할 수 있게 되었다. 일본에서 꽤 대박을 친 소설이라서 문고판도 나왔고 아이북스에서 비교적 저렴한 가격으로 구매할 수 있었다(일본어 소설 정도는 독해할 수 있을 정도로 공부한 보람이 이럴 때 빛을 발하나 보다). 그렇게 2024년 3월 한 달 동안 시간이 날 때마다 틈틈히 이 소설을 읽었고, 다 읽는데까지는 약 한 달 정도 걸렸다. 소설을 다 읽고 나서는 바로 애플TV에서 영화화 된 정욕(正欲)을 대여해서 관람했다.



    1. 정욕(正欲)

    정욕이란? 한자 그대로 풀어내면 ‘올바른 욕망’이라는 뜻이다. 노린 것으로 보이는데, 일본어 성욕(性欲,せいよく)과 발음이 같다. 올바른 욕망, 그렇다면 틀린 욕망이라는 것도 있을 것일까. 이 소설은 삶의 의미에 대한 누군가의 성찰과 꺼림찍한 사건에 대한 설명으로 시작되는데, 서로 무관한 듯 하면서도 제각각 정욕이라는 공통의 주제를 향해 나아가는 전개가 너무나 흡입력있었다.

    이 소설에는 3명의 중심인물이 있다. 검사라는 직업에 걸맞게 사회의 규칙과 기준을 지키기 위해 반듯하게 살아가는 테라이 히로키. 하지만, 그에게는 등교를 거부하는 외동 아들이 있다. 키류 나츠키, 대형 마트의 침구 판매 사원으로 일하고 있지만 자신의 일에만 충실할 뿐 사회와 집단에는 크게 어울리지 못하는 모습을 보인다. 코베 야에코, 대학 축제 행사를 준비하면서 테마를 ‘이어짐’으로 잡고 소수자의 다양성을 인정하고 서로 이어나가려는 모습을 보인다.

    전혀 관계 없어 보이는 세 사람의 이야기는 ‘한 사건’으로 서로 연관성을 가지게 된다. 과연 그들에게는 어떤 일이 있는 것일까.

    2. 올바름.

    스마트폰과 소셜 미디어가 우리 일상에 자리잡기 시작하면서 세상은 크게 변했다. 지구 반대편에 있는 나라의 일상 속 모습과 사건사고를 실시간으로 알 수 있게 되었고, 사회 곳곳에 존재하던 소수자들의 존재와 그 목소리도 더 커지게 되었다. 기존에 존재하던 인종, 국가, 성별, 종교를 뛰어넘는 사회적 약자와 다양한 소수자들의 다양성과 올바름 추구하는 새로운 시대로 접어들었다. 하지만, 이런 다양성과 올바름에 대한 목소리만큼이나 그 반발도 커졌다. 이러한 움직임을 거부하는 사람들은 ‘정치적 올바름(PC, Political Correctness)’이라는 개념으로 지칭하며 불편함을 대놓고 표현하거나 조롱하며, 심지어 더욱 더 큰 혐오로 맞서게 되었다. 그래서 ‘올바름’에 대한 논란은 이전투구가 되어 사실상 논의는 불가능하고 수많은 사건사고의 원인이 되어버렸다.

    그렇다면 올바름이란 무엇일까. 그 기준을 정하는 것조차 쉽지 않다. 누군가는 지극히 주관적인 올바름을 갖고 있는가 하면, 누군가는 사회의 규율과 기준을 중심으로 올바름을 판단한다.

    이런 세상 속에서 올바름을 추구하려는 것 자체가 자가당착에 빠지게 되는 함정이 된다. 사람들 저마다 가진 이념과 성향은 올바름이라는 기준으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없기 때문이다. 심지어 사회의 법률과 규율로 범죄자들을 재단하며 올바름을 추구하는 검사 히로키마저도 말이다.

    과연 이 세상은 서로를 인정하고 이해하며 받아들일 수 있기는 한 것일까? 그 기준은 어디부터 어디까지일까?

    3. 연호.

    이 소설의 이야기는 일본의 연호가 헤이세이에서 레이와로 넘어가게 되는 2019년 전후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한국에서는 이 연호라는 개념이 생소하긴 하지만, 입헌군주제인 일본에서는 일왕의 세대 교체와 함께 말그대로 ‘새로운 시대’가 시작된다는 분위기였다. 과연 기대했던 것만큼 그만큼 세상이 새롭게 바뀌었는지는 의문이지만, 이 소설에는 새로운 연호가 하나의 전환점이 된다.

    (세상이 변할 것으로 믿었지만 사실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몇년전 전세계를 휩쓸었던 코로나19 팬데믹을 통해 우리는 선진국과 인간들의 다양한 민낯을 볼 수 있었다)

    굳이 연호까지 가지 않더라도 우리는 매년 12월 31일부터 1월 1일 사이에 새로운 한 해라는 개념을 접하게 된다. 누구나 새해의 희망과 다짐을 이야기하지만 현실은 전혀 바뀌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저 1년이라는 시간의 단위가 변했을 뿐이다.

    사실 연호든 새해든 모든 순간에 의미를 부여하며 그것을 어떻게 실행해 나갈 것인지는 각각의 몫이다. 이 세상이 만들어 놓은 기준에 맞춰 나갈 것인지, 스스로 그 기준을 만들어나갈 것인지는 모두 다르다.. 그렇게 우리는 저마다의 인생을 이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다.

    4. 다양성

    이 세상에는 정말 상상을 초월하는 다양한 사람들이 존재한다. 그중에는 소아성애처럼 사회적으로 절대 용인될 수 없는 것들도 있다.

    이런 다양성을 사회적으로 어디까지 인정하거나 용인하느냐의 기준은 쉽게 말해서 남에게 피해를 주느냐, 혐오감을 주느냐 정도일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범죄가 아닌 이상 최대한 이해하려고 하려고 하지만, 그 반대의 사람들은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 자체를 거부하고 사회적으로 배척하려고 한다.

    이것을 잘 알고 있는 소수자들은 존재감을 드러내지 않고 조용히 숨어 있는 경우가 많다. 그렇게 이 세상 속에 제대로 융화되지 못하고 아웃사이더로서 살아가거나 미련 없이 떠나버리는 경우도 없잖아 있다.

    그렇지만 그렇기에 그런 소수자들은 서로를 정확히 이해할 수 있다. 인터넷을 통해 서로의 존재를 파악하고 연대하며 하나의 사회적 현상을 만들어나가며, 다양성의 시대에 발맞춰 긍정적인 결과로 이어질 수도 있다. 혹은, 그 과정에서 수많은 마찰이나 갈등이 빚어질 수도 있고 법률에 근거한 제약이 진행되며 상황이 극단적으로 치닫을 수도 있다.

    이것이 바로 다양성의 시대가 가진 큰 숙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5. 소설.

    이 소설은 참 얄궂게도 등장인물들이 처한 상황을 통해 이 다양성의 시대의 모순과 자가당착, 위선 등을 고발하는 듯 하다. ‘다양성을 인정하자’라는 단순한 명제를 여러 번 꼬아낸 듯한 이야기의 전개는 우리가 기존에 갖고 있던 가치관과 사고방식을 크게 뒤흔들며 혼란스럽게 만든다.

    그래서 ‘이 책을 읽기 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라는 다소 자극적인 광고 문구를 내건 것일까. 그만큼 이 소설은 문제작으로 불리기에 충분한 듯 하다.

    6. 영화.

    영화는 2시간이 넘는 영화 상영시간에 그 많은 이야기들을 담기에는 부족하기 때문에 원작에 비해 많은 부분이 함축되거나 생략되어 있다.

    그래도 이 소설이 말하고자 하는 주제 자체는 확실히 와닿는다. 다만, 영화 구성 자체를 원작처럼 더 비슷하게 만들었으면 좋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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